• 2024/11/29 햣켄이라는 사람은 눈이 배꼽 주변에 붙어 있고, 마음도 뇌나 심장에 있는 게 아니라 명치 부근에 있는 게 분명하다. 글도 배꼽 부근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따금 흠칫한다. 햣켄은 시각 장애인인 미야기 미치오에게 “장님도 미인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마음이 뇌 부근에 있는 사람은 절대 묻지 않을 질문이리라. 미야기 미치오는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주변의 공기로 안다고 한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못생겼다는 건 장님한테도 들킨다. 어떻게 그런 걸 묻나. 아니, 잘 물어주었다. 장님도 미인을 좋아한다는 걸 잘 가르쳐주었다. 나는 좀 더 흠칫하고 싶다.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햣켄이 좋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이 되어서야 내가 이 세상에 뭘 하러 왔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엔 이렇다 할 볼일이 없다. 볼일은 없는데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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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9 혐오와 차별의 태도, 언어에 맞서는 일은 중요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위의 조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도 천명륜이 뇌성마비 장애를 흉내내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고 피곤한 싸움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도덕적으로 청소된 언어와 이미지 공간보다 더 복잡하다. 분명 천명륜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 점에서도 나와 완전히 달랐다. ‘어쩌다 보니’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우리는 늘 몸과 몸으로 붙어 있어야 했다. 그 과정은 갈등, 대립, 교섭의 연속이었다.  그는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블로그의 마지막 게시물에 그가 적었다.  “같이 걸을 때 가끔 원영이 형과 어깨동무를 한 채 걷고 싶다. 그런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대신 휠체어 손잡이로 그 느낌이 전해져오기도 하여, 형의 뒤에서 뒷머리를 바라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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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9 자기 언어, 자기 세계를 갖는다는 건 힘겨운 투쟁이에요 / 곡 쓰는 일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모르겠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나이브해서 가짜 같애, 인스턴트같잖아요. 사랑보다는 그냥 헌신의 마음이라고 해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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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9 드라마는 무조건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거예요. 단 하나, 그 고통과 결부되어 얻는 인생의 통찰을 다루는 거기 때문에 윤리학과는 뗄 레야 뗄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참 신기하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나도 좀 나아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했으니 죽일 놈인가?’ 같은 죄책감, 쓸쓸함, 허무함을 혼자 껴안고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걸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민망하지 않게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에겐 그게 소설이고, 누군가에겐 영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겐 드라마인 거예요. 그러니까 드라마를 본다는 건 사실 참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드라마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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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9 그런 삶을 바라볼 때 슬픔과 분노, 어느 쪽을 더 크게 느끼시나요? / 슬픔이 더 커요. 연민이 느껴지죠. 같이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인간의 본질은 카페에서, 칼국수 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럴 때는 다 똑똑하고 인간 같아요. 그런데 어떤 예민한 분기점이 있을 때 ‘와, 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야?’ 하고 느끼면 슬퍼요. 함께 밥을 먹고 몸을 맞대고 살아왔는데, 분노도 일지만 같이 해왔던 시간을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들죠. 드라마나 연극도, 보는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인생 전반에 연민을 느껴야 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이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그게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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